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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인생의 덧없음 1 - 어느 한 여인의 인생을 함부로 그리며


아마 50대 중후반은 된 것 같다며칠 전 중학교 근처 농협에서 본 그녀의 모습이다물론 그녀를 전에도 본 적이 있다심지어 한 10여 년 전쯤에도 그녀를 본 기억이 있다왜냐하면 그녀가 그녀의 부모들로 보이는 사람들과 함께 우리집 아파트 단지의 조그만 슈퍼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그녀를 처음 본 건 그보다 훨씬 이전인 중학교 시절 다니던 교회에서였다어느 일요일 오전, 교회 예배당 뒷줄에서 찬송가를 부르던 그녀의 모습이 내 기억에는 아직도 남아 있다그때 그녀는 여느 젊은 여성들과 다를 바 없이 그저 평범해 보이는 직장 여성의 모습이었다.

 

오랫동안 잠재되었던 그녀에 대한 기억이 내 의식의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된 건 내가 아버지 아파트에서 살 때 길을 지나치거나 슈퍼에 물건을 사러 가다 우연히 그녀와 마주쳤기 때문이다물론 내가 그녀를 특별하게 기억할 이유는 없다단지 어린 시절 교회에서 봤던 사람이라는 것 말고는 말이다그리고 그녀는 나라는 사람을또는 20여 년 전 교회 예배당 뒷줄에 조용히 앉아 있던 어린 나에 대해서도 전혀 모를 것이다.우리는 평생 말 한 마디 주고받은 적 없는그저 서로에 대한 기억의 비대칭성만 존재하는 아무 특별한 의미가 없는 관계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전에도 그랬지만 며칠 전 그녀를 보면서 동정심이 더욱 크게 이는 것을 느꼈다그녀는 결혼을 하고 자녀가 있는 여느 중년 여성의 모습이 아니었고직장이나 어떤 단체에 소속되어 있는 것 같지도 않았으며누군가와 함께 걷거나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 또한 거의 본 적이 없는 그런 조용해 보이는 사람이었다지금 생각하면 그녀가 누군가와 함께 있던 모습은 그녀의 부모들이 거의 전부였던 것 같다옷차림도 행색이 초라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유행을 의식하거나 세련된 멋이 없는단지 기능적인 이유만으로 옷을 입는 듯한 소박한 모습이거나 근처 밭에서 금방 일을 하고 나온 듯한 일터 옷차림이 내가 그녀에 대해 기억하는 겉모습의 전부다.

 

여태 본 그녀의 모습으로 추정한 그녀의 사회적 정체성이나 지위는그녀는 인구 2만도 안 되는 동해안의 조그만 어촌 마을에서배우자나 자녀 없이 50대 미혼의 여성으로 부모들과 함께 사는고정된 직장이나 특별한 단체친구 모임 등 사회적 관계가 거의 없는사회적 집단이나 소속이 없이 거의 최소한의 사회적 관계만을 유지하고 있는거의 100% 원자적 개체로서의 자연인의 정체성으로 살아가는 그런 사람의 모습이다마치 삶의 의미가 생물학적 존재의 지속이나 유지 외에는 다른 것을 찾아보기 힘든 그런...

 

그녀는 여태 그녀가 살아온 50년 넘은 인생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할까그녀도 어쩌면 TV드라마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결혼을 하고자식도 낳고명절 때면 남편과 함께 시댁에 내려가고부부가 함께 돈을 모아 아파트도 사고자동차도 사며 그렇게 평범하게 살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그녀가 그런 소시민적인 시시한’ 인간들의 삶의 가치를 추구하지 않았다면그녀는 지난 시절 역사의 거대한 물줄기 속에서 학생이나 노동자로서 이 사회의 정의로운 변화를 위해 부단히 현실과 맞서며 뜨겁고 열정적인 인간 존재로 살았을까이도저도 아니라면 그녀의 인간으로서의 존재적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그녀는 내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TV 드라마처럼 사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하기 시작할 무렵 그것을 증명해 준 한 사람인지도 모르겠다세상 사람들 모두 일일 드라마처럼 보편적이거나 정형화된 모습으로 사는 게 아니고그런 평균의 모습 밖에서 그냥 무색무취의 존재로 남아 있는 예외적인 인간들도 얼마든지 있다는 사실 말이다물론 규격화된 삶을 살아가는 보통사람들의 삶이라고 특별할 건 없을 것이다단지 자신들이 대중 소비사회의 일원으로 그 거대한 부류에서 지켜지는 삶의 양식이나 규범에서 소외되지 않고 꼭두각시처럼 열심히 잘 따르거나 잘 소속되어 있다는 것에 안도를 느낄 뿐일 것이다그러나 회색지대에 놓인 예외주의자들 역시 보통 사람들이 추구하는 삶의 목적을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이루지 못하거나자기만의 남다른 삶의 가치를 끝까지 추구하지 못했을 때황혼이 가까워지는 나이가 다 되어 초라한 자신의 삶의 모습 앞에 후회나 허무에 젖지 않을 것이란 보장은 없다.

 

 ......

 

50대 후반의 한 여인의 삶에 대해 내 멋대로 소설(?)을 쓸 권한이 내겐 없다어쩌면 겉으로 본 내 판단이나 동정심과 달리 그녀의 삶은 다채롭고 풍요로우며 세상과의 따뜻한 관계 속에 행복한 일상을 이어가고 있는지 모른다스스로 삶을 잘 일구며 살고 있는 한 인간 존재에 대해 내가 아주 무례한 건방을 떤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만약 내가 상상한 것과 그녀의 실제 삶이 큰 차이가 없다면그리고 그런 가정의 현실화에 대해 내가 정작 의식하는 것은그녀에 대한 값싼 동정보다 오히려 내가 그녀와 비슷한 인생의 말로를 걷게 되는 건 아닐까에 대한 두려움이다명문대를 나와 고소득과 안정성이 보장되는 좋은 직장을 얻고아름다운 배우자를 만나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으며값비싼 자동차와 고급 아파트를 사는 등등...이런 대다수의 사람들이 추구하는 보편적 가치를 굳이 나쁘다고 볼 필요는 없지만 인간이 살아가는 이유의 전부가 될 수는 없기에 어느 정도 외면하며 내 가치를 지킬 수는 있지만...세상을 향해 자기 존재 의미와 가치를 발산하지 못한 채홀로 방구석에 처박혀 사람 속에 놓여 있는 인간이 아닌세상과 유리된 생물적 존재로 삶을 소모하다 결국 쓸쓸하게 생을 마감한다면그것만큼 인생이 허무하고 덧없는 것은 없을 것이다.

 

사람이 세상과 오래도록 단절된 채 존재의 유지 외에 특별한 생의 의미부여가 필요 없는 생물적 존재로 살다 생을 마감한다면과연 그의 인간 존재로서의 삶의 가치는 어떤 의미를 가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