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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늙는다는 것, 또는 인간 존재의 고상함에 대한 회의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그 시간만큼의 많은 경험과 지식으로 인간과 세상에 대한 더 넓은 시야와 더 깊은 성품을 갖춘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기대는 어쩌면 그 시간만큼 여유로운 경제적 조건을 갖춘 일부의 중산층 중년들에게나 어울릴 모습인지 모르겠다. 나이가 들어 노후대비가 충분하지 못한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들보다 생존에 대한 집착이 더 강렬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꼭 경제적 조건으로 인간의 나이듦의 가치가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여유로운 경제적 조건을 갖추고 있더라도 무수한 인간 경험을 통해, 또는 자신의 개인적 성향으로 인간의 본질을 이기적인 존재로 규정한 사람이라면 세상을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의 장으로 이해할 가능성이 높고 따라서 세상과 인간에 대해 냉소하며 자기나 자기 가족의 이익을 위해 악다구니도 불사할 것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런 모습이 보다 일반적인 것 같다. 


나이가 들면 맛난 음식에 본능적으로 반응하는 개처럼 인간도 물신화에 거의 본능적으로 반응하는 것 같다. 물신화가 중장년층에게만 해당되지는 않지만 아무래도 더 민감하지 않나 싶다. 이런 판단 역시 인간에 대한 불신을 한층 높이는 얘기겠지만...


몇 해 전, 주문진에 살면서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여인숙에서 하룻밤을 머문 적이 있다. 비용을 아끼려고 전화까지 해서 찾아간 곳인데 하룻밤 만원인가였다. 입구에서 본 여인숙은 70~80년대 대학 하숙집 같이 조그만 방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모습이었는데, 마침 주인이 저녁 식사를 막 마치며 밥상을 옮기는 중이었다. 50대 후반 쯤으로 파마 머리에 굵은 안경테를 쓴 여주인이 방을 안내했는데, 난생 처음 간 여인숙이라 어색함을 피하려고 비용을 지불하고는 신을 벗고 마루를 건너 바로 방으로 들어갔다. 


2~3평 정도 될까 손바닥만한 방 안은 음습한 느낌에 담뱃재 냄새가 풍겼는데, 청결하지 못한 이불에서 보듯 오랫동안 청소가 안 된 지저분한 방이었다. 동생의 장례를 치른 후 심신이 많이 지쳐 있는 상태였기에 난 이른 저녁부터 잠을 청한 후 다음날 새벽에 일찍 떠나려고 했다. 어둑컴컴한 방에 홀로 누워 이불을 뒤집어 쓰고 있는데 밖에서는 주인 여자가 머리를 감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조선족 억양의 여성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주인과 밀린 방세 이야기를 주고 받더니 밖은 다시 조용해졌다. 여인숙이란 이런 곳인가 했다. 어쩌면 세상의 맨 하층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 사는 그런 곳... 그리고 다시 잠을 청하려는데 천장에 붙은 화재경보기에서 간헐적으로 '딱-딱' 하는 신호음이 계속 들려왔다. 신경이 쓰여 여주인을 불러 테잎으로라도 소리가 나오는 구멍을 막아 달라고 부탁을 했고, 잠시 후 젖은 머리를 한 채 노란 테잎과 가위를 들고 여주인이 들어왔다. 그리고 경보기에 대해 혼잣말을 하며 테잎을 자르고 붙이고 있었는데 에서 역한 돼지고기 냄새가 풍겼다. 

 

테잎을 다 붙인 후 여주인은 무슨 의도인지는 모르겠으나 나같은 사람이 이런 여인숙에 낯선 것 같다는 인상을 풍기면서 저녁을 먹지 않았으면 라면이라도 끊여 주겠다며 호의를 베풀었는데 난 사양을 했다. 그리고 여주인이 물러 간 후에도 난 어둔 방 안에서 쉽게 눈을 붙이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저런 생각에 사로 잡힌 채 여러 시간이 흘렀는데, 갑자기 밖에서 취기가 느껴지는 한 젊은 남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가격을 흥정하는 이야기가 들렸고 이내 옆방으로 여주인과 남자가 들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문득 처음 왔을 때 옆방의 열려진 틈으로 웬 침대가 놓여 있던 게 생각났다. 그리고 잠시 후 옷을 벗고 두 남녀가 뒤엉키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다음날 이른 아침에 그 집을 나서면서 입구의 스티로폼 화단에 심어 놓은 파릇한 상추는 여느 집처럼 전혀 소박하거나 예뻐 보이지 않았다. 어제 여주인의 입에서 풍긴 역한 돼지고기 냄새가 떠오르면서 단지 생존을 위해 취해야 하는 수단 그 이 외에는 다른 어떤 것으로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 낯선 여관에서의 하룻밤은 인간 존재의 고상함이 그렇게 현실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닫게 만든 경험이었다. 달리 말하면 단지 생존한다는 모습 자체가 그렇게 아름답고 소중한 모습인지 의문이 들게 만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