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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관/진보의 오류

진보적 계몽주의, 과연 얼마나 많은 대중이 공감할까


인간세계는 복잡하다. 자연세계를 이해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인간세계는 더더욱 이해하기 어렵다. 자연과학처럼 법칙대로 작동한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인간 사회를 정확하게 이해했고 사회 모순에 대해 바람직한 해법을 제시했다는 무수한 이론과 사상들이 결국 시간이 지나고 나서 오류투성이로 판명 나는 것은 인간 사회를 과학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자기가 살고 있는 사회를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바라 볼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인간 사회가 정치적 권력 관계 속에서 구조적으로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진보주의자들이 사회의 문제점을 밝혀내고 이에 대한 해법을 만들어 바람직한 변화를 꾀하려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문제는 역시 변화의 주체인 대중이다.

 

주권의 토대가 왕이나 귀족이 아닌 일반 시민들에게 기초한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치 변화는 그 사회의 대중이 주체가 돼서 이루어진다. 선거와 같은 정치적 변화를 예로 든다면, 정치세력 또는 정당은 유권자들에게 현재 자기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들의 대안이나 해법을 정책으로 제시하고 이에 대해 공감을 얻어야 권력을 얻을 수 있고 이를 통해 사회변화를 꾀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대중을 설득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위에서도 말했듯이 인간 사회가 복잡하다는 것이다. 사회 현상이라는 것이 자기 동네나 직장에서 일어나는 일처럼 주변에서 직접 접하는 익숙한 현상이 아니라 국가나 지역 사회처럼 넓은 범위에서 일어나고 그 전달 경로도 언론 매체를 통해 간접적으로 접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서 내 일처럼 세세하게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안 자체도 정치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환경, 사법 등 영역이 광범위한 데다 정확한 이해를 위해서는 어느 정도 전문적인 지식이 필요한 경우가 대부분이라서 단편적인 지식 외에는 별다른 배경 지식을 갖추지 못한 일반 대중이 이해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둘째, 대중은 기본적으로 무식하다. 대중은 공부를 좋아하지 않는다. 사회 현상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TV뉴스나 시사프로그램, 신문기사나 잡지, 단행본이나 논문 같은 사회 현상과 관련된 매체들을 꾸준히 접하는 등 사회 현상을 과학적이고 비판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지적 훈련이 필요한데, 일반 대중은 학습 노동이 필요한 이런 과정을 어렵고 따분하게 여기는 경우가 대부분이라서 꺼리기 마련이다(대중들은 TV드라마나 야구 중계, 음주가무처럼 오락이나 놀이를 훨씬 더 좋아한다.). 그나마 일반 대중이 사회문제를 접하는 통로는 TV뉴스나 신문기사가 대부분인데, 이런 매체들의 경우 대개 단순 사실 전달에 치우쳐 사회 문제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기르는 데 한계가 있다.

 

더욱이 일반 대중이 진보적 세계관을 갖춘 계몽된시민으로 완성되는 과정에는 체계적인 학습 또는 의식화과정이 필수적으로 요구되는데, 이런 과정은 진보주의자 자신들이 체계적이고 일원화된 진보적 정체성을 갖춘 진보주의자들로 완성되는 데 들어간 학습 시간이나 의식화기간의 비용을 생각하면 일반 대중에게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대개 진보주의자또는 운동권이 되는 일반적인 과정은 대학에서(노동조합이나 건설현장 아르바이트 등 여타의 직접적인 경험이 있지만 일반적인 과정을 생각한다면) 다양한 책을 읽거나 강연을 듣고 다양한 사람들과 토론을 하며 최소 3~4년 이상 진보적 먹물이 스며드는 과정을 겪어야 하는데, 이런 긴 시간을 대학생처럼 노동 활동이 거의 없는 유한 계급 신분으로 보내는 것은 시간과 비용 차원에서 일반 대중에게 기대하는 것은 무리라고 봐야할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대중들이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고 싶어도 노동시간이 너무 길어 신문 한 줄 읽을 여유가 없거나, 여가 시간이 있어도 한 주간의 노동에 대한 피로 회복을 위해 충전의 시간으로서 가족친화나 취미생활, 문화나 소비 활동 등, 다른 활동들로 시간을 보내야하기 때문에 사회 문제에 따로 관심을 갖기가 어렵다. 물론 오히려 이런 각박한 현실이 사회 문제에 대한 관심이나 문제 의식을 더욱 촉발할 수도 있지만 양 측면을 비교한다면 우리가 일상에서 접하는 경험적 사실은 정치 불신이나 무관심이 보다 일반적인 현상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셋째, 대중은 이성적이지 않다. 하늘에 비행기가 날고 우주 밖으로 로켓을 쏘아 올리고 지구 반대편에 사는 사람과 실시간으로 대화를 나누 등 등 최첨단 과학문명 속에서 사는 현대인들은 전근대 사회의 사람들과는 비교가 안 되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이런 의미에서 인간을 이성적 존재라고 정의하는 것과 인간 사회 속에서 인간이 자기 사회의 규범이나 질서, 생활양식을 대하는 방식에서 이성적 사유나 행동양식이 작동한다고 기대하는 것은 서로 별개라는 것이다.

 

이건 마치 학교에서 근대 자연 과학의 원리를 배운 학생이 모든 만물이 원자와 분자 등 물질 구조로 이루어져 있고 어떤 존재도 물질 구조라는 존재 형식 밖에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배웠다 해도 매주 일요일 교회에 나가 과학적으로 그 존재 형태를 증명할 수 없고 단지 인간 의식 속에서 관념이나 상상의 형태로 존재하는 신이라는 허무맹랑한 실체를 별 이성적 판단 없이 추종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인간이 오늘날까지 이룬 문명사회의 결과는 인간 이성의 산물일지라도 역설적이게도 그 반대편에서 인간들이 살아가는 방식을 보면 동물사회에서 통용되는 야생적 권력관계나 위계질서, 불합리한 집단 규범이나 인습이 횡행한다는 점에서 인간이 이성적이라는 의미는 자연과학에서는 적극적으로 수용될 수 있을지 몰라도 인간 사회 속에서는 모든 생활 양식에서 그대로 실현되지는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인간의 이성은 제한적으로 인정될 뿐이고 인간들의 행태를 규정하는 원리는 이성이라기보다 자기 주위를 둘러싼, 자기를 압도하는 집단적인 관습과 규범, 권력질서인 경우가 오히려 보다 일반적이다.

 

선거 시기가 오면 대중은 모든 후보들의 정책과 공약, 이념적 성향을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비교해서 자신이 원하는 후보를 선택하는 이성적또는 합리적방법을 따르지 않고 자기와 친분이 있거나 자기 학교나 고향 출신 등 자신의 주관적 편의에 따라 후보를 선택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물론 자기 지역 출신의 후보 당선이 자신의 정치경제적 이해관계와 연결되기 때문에 이런 선택 기준이 합리적인 기준일 수도 있지만, 이런 선택으로 직접적으로 이익을 보는 사람들은 지역 유지 등 지극히 제한적인 몇몇 사람들의 경우가 대부분이다.

 

광주의 아이들과 대구의 아이들이 어른이 되면 왜 자기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정당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는지는 결코 이성적으로 쉽게 설명되지 않는다. 단지 지역적인 집단적 정체성이 자신의 정치적 정체성을 규정하는 기준이 됐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즉 대구에서 나고 자라면 줄곧 박정희나 새누리당 칭찬하는 얘기만 듣고 민주당 욕하는 얘기만 듣게 되어 결국 또 다른 박정희교의 신도나 새누리민국국민으로 재생산되는 것이다. 어떤 정당의 이념이나 정책이 자신의 정치 경제적 이익, 자신의 정치적 세계관과 일치하는지에 대한 이성적 분석이 아니라 맹목적인 집단 관습이나 규범, 정치적 인습이나 위계질서, 정치 문화 등에 의한 정치사회화로 인해 그 사람의 정치 세계관은 지배되고 고정되는 것이다. 이건 이성의 영역이라기보다 습관이나 문화, 정서의 영역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아무리 인간이 이성의 결과물인 최첨단 과학 문명 속에서 살고 있다 해도 컴퓨터처럼 냉철한 분석력으로만 행동을 결정하지 않으며 증명 불가한 신과 같은 비과학적인 절대적 대상을 추종하며 정신적 위안을 얻는 것에서 보듯 인간 존재는 근원적으로 비합리적이거나 비이성적인 특성이 혼재된 존재다. 진보가 자신들의 논리를 통해 대중의 지지를 얻을 수 있다는 전제는 인간이 이성적이라는 전제에서 시작하는 것인데, 인간 존재가 이성적이라는 것은 분명 다른 생물체와는 구분되는 독보적이고 명확한 특성이지만 결코 절대적이지 않다는 점에서 진보의 계몽주의는 보다 신중한 접근 속에서 시도돼야 한다. , 진보의 인간 존재나 대중에 대한 이해 방식이나 전제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

 

넷째, 진보적 계몽주의를 전파할 수단인 언론 자원 차원에서 진보가 밀린다. 권력을 장악한 세력은 그 권력을 계속 유지하고자 하는 속성이 있다. 이건 보수나 진보라는 이데올로기 진영과 무관하게 권력을 장악한 모든 세력에게서 나타나는 권력의 공통 속성이다. 그러나 권력 유지를 위한 정치 활동이 정당한가 부당한가는 어느 정치 세력에게나 공통된 속성은 아니다. 예를 들어, 권력을 장악한 세력이 개방된 공간에서 반대 의견과 정정당당하게 경쟁하며 사실과 논리적 타당성에 근거해서 국민들의 여론 형성에 영향을 미치면 그것은 국정 홍보가 되지만, 반대 의견을 허용하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사실을 왜곡하거나 편향된 정보를 주입하려고 하면 그것은 정치 선동이 될 것이다.

 

한국 정치에서 극우 보수 세력은 권력 장악의 기간이 훨씬 길었는데 권력 유지 차원에서 관제 언론과 다를 바 없는 극우 보수 언론이나 행정 기관 및 교육 기관을 통해 대중을 선동하고 여론을 조작해 온 것이 사실이다. 이런 모습은 권력을 유지해야 하는 입장에서 볼 때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사실을 왜곡하거나 편향된 정보를 퍼트리면서 자신들에게 유리한 여론을 국가적인 차원에서 보편화한다는 점에서 정치 선동이나 다를 바 없었다.

 

보수 세력은 정치 권력이든 경제 권력이든 대중의 여론을 형성하고 주도할 수 있는 언론 매체인 방송이나 신문사 등의 대부분을 지배하고 있고 교육 기관 등 행정 기관도 장악하고 있으며, 심지어 종교 집단조차도 보수 세력에게 우호적인 경우가 많아 한국 사회의 여론 형성 지형에서 우위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어떤 주장이나 견해가 여론이 되는 것은 대중이 어떤 사안을 판단하기 위한 정보나 주장이 사실이나 논리적 타당성에 근거했느냐 아니냐보다 얼마나 많은 매체들이 그런 주장을 떠들고 퍼뜨리며 얼마나 많은 대중이 그런 주장이나 견해에 둘러싸여 포섭되고 그런 얘기를 반복적으로 말하며 다시 퍼뜨리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측면이 크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 목소리가 큰 놈이 이긴다는 얘기와 다를 바 없는데, 따라서 여론 지배 과정은 매체를 많이 보유한 세력에게 기본적으로 유리하다고 봐야한다.

 

이러한 언론 지형에서 진보가 가지고 있는 언론 자원은 보수와 비교할 때 양적으로 크게 밀리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설사 진보의 계몽주의가 사실과 논리에 근거한 정당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고 해도 그 효과가 보수의 영향력을 압도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물론 인터넷이라는 대안 매체가 있어 과거처럼 왜곡된 정보가 일방적으로 유통되지는 않지만 언론 자원 차원에서 진보의 계몽주의는 일정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끝으로, 진보의 계몽주의에 대한 대중의 동의 여부이다. 대중의 지적 이해 능력을 떠나 진보가 자기 주장을 과도하게 관념적으로 진행할 경우 대중은 진보가 뭔 얘기를 하는지 알 수가 없게 된다. 심하게 표현하면 진보의 주장과 개가 짖는 소리 간에 구분이 안 될 수가 있기 때문에 진보의 설득 능력이 중요한데, 일반적으로 진보가 대중의 눈높이를 맞추지 못하고 자기 세계에 빠져 자기들끼리 통하는 용어나 웬만한 대학 졸업자들도 어려운 학술적이거나 철학적인 주장을 아무렇지 않게 구사하여 주장이 과도하게 관념적이고 때로 횡설수설한다는 느낌을 받는다는 비판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진보의 주장 능력의 한계가 지적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진보가 내세우는 주장의 비현실성을 들 수 있다. 진보는 불의한 인간 사회를 정의로운 사회로 바꾸기 위해 존재한다는 점에서 도덕적일 수밖에 없고 이러한 문제의식은 인간 사회가 정상적이고 상식적으로 작동하기 위해서 반드시 존재해야 할 가치이다. 그러나 그 사회가 처한 조건과 상황 속에서 대중이 어느 정도로 진보의 문제의식과 원칙에 공감할 것인가는 별개의 문제이고, 오히려 그 사회의 현실과 조건, 대중의 정서를 무시한 채 절대적이거나 원칙론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오히려 진보의 주장을 하느님의 나라에서나 실현될 수 있는 이상적인 것으로 여기게 만들어 대중들이 진보세력에게 등을 돌리게 만들 수 있다. 모든 사람들이 초등학교 1학년생처럼 순수하면 모르겠으나 인간은 나이가 들수록 세태에 물들어 이기주의에 충실한 인간이 되기 쉽다는 점에서 현실과 괴리된 과도한 이상론은 대중의 공감을 얻기 어렵다.

 

또 그 사회가 처한 조건에서 실현 목표를 어느 수준까지 설정하는 것이 실현 가능한가라는 현실 가능성 문제도 있는데, 대개 진보가 내세우는 주장은 모든”, “절대”, “반드시와 같은 부사를 동반한 100% 완결된 목표로서의 근본적인 해법이나 최대치를 주장하는 경우가 많아 변화의 주체인 대중이 쉽게 동의하기가 어려운 경우가 많다. 따라서 진단에는 동의할 수 있을지 몰라도 처방에 대해 대중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이유는 바로 진보가 내세우는 주장의 목표치가 대중이 동의하기에는 과도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렇게 진보가 내세우는 주장이나 해법이 과도한 이상주의에 젖어 있거나 실현 가능성이 낮을 경우 대중은 진보세력과 함께하기보다 그들에게 등을 돌리게 되고 그 반대급부로 진보 세력은 소수화 되거나 고립화될 가능성이 높고 결국 그 사회에서 바람직한 사회 변화를 주도하여 유효하고 유능한 정치 세력으로 존재하지 못하고 단지 액세서리 같은 정치적 장식물로 존재하거나 쇠퇴할 가능성이 높게 될 것이다.

 

진보적 계몽주의라는 개념에는 대중이 이성적이기에 계몽의 가능성이 충분하며 자본주의의 모순만 제대로 이해시키면 사회변화에 적극적인 주체세력으로 나서게 되어 사회 변화가 이루어지고 역사가 발전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그러나 나는 이런 전제가 대중의 긍정적인 측면인 한쪽면만 보며 설정된 잘못된 전제라고 본다.

 

일단 이런 전제는 대중을 자신들의 의도대로 변화시키는 것이 가능하다는 진보 엘리트들의 오만함이 반영 돼 있다. 어떤 사회가 중대한 문제점을 안고 있다면 그 문제점을 밝혀내어 해법을 만들고 그런 해법이 대중의 동의에 의해 선택되기 위해서는 대중 계몽(설득이라는 낱말이 더 낫겠지만)이 필수적인 과정이지만 진보 엘리트들의 진단이 언제나 정답인지도 의문일뿐더러 그런 해법이 대중들에게 일방적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란 태도 또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런 태도가 심화되면 오히려 대중이 진보 지식인들을 비웃거나 무시하여 진보 세력과 대중이 멀어지는 결과가 나올 수 있다.

 

또 대중이 이성적이란 일방적인 전제도 대중은 언제나 비이성적인 집단주의에 휩쓸릴 위험성을 안고 있다는 점에서 타당하지 않다. 다수 대중에게 자본주의의 모순만 제대로 의식화시키면 갑자기 받아서 하루아침에 세상을 뒤집어엎는 적극적인 주체가 될 것이란 전제도 자본주의의 분석에 대한 자신들의 이론과 주장에 대한 과도한 자신감에서 나온 오만한 발상이자 대중의 소극성과 이기적 속성에 대한 몰이해에서 나온 전제이다.

 

진보가 불의와 모순으로 가득 찬자본주의 체제의 문제점을 해결할 방법으로 제시하는 주장들에 대해 대중에게 동의를 얻으려면 자신들의 주장이 언제나 도덕적으로 우월하고 과학적으로 타당하다는 절대성, 즉 나만 옳고 정답이다는 절대성에서 벗어나야 하고, 높은 강단 위에서 그 아래에 있는 대중을 가르친다는 권위적 자세가 아니라 강단에서 내려와 비슷한 눈높이에서 그들과 대화하고 설득하여 동의를 얻거나 선택을 받는다는 겸손한 자세로 다가가야 한다. 또 자기들 세계에 갇혀 대중을 자신들이 보고 싶은 대로 보고 이해하고 싶은 대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대중이 갖고 있는 부정적 속성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여 대중에 대한 보다 면밀하고 정확한 분석을 통해 진보의 주장에 그들이 동의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진보적 계몽주의가 극우보수적 계몽주의와 경쟁 관계에 있다는 점에서 그 사회의 언론이나 이데올로기 환경에 대한 분석과 이해에서도 마찬가지다. 언론 환경에 대한 객관적이고 면밀한 분석에서 이데올로기 경쟁을 펼쳐야 대중의 공감을 얻는 데 승리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