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세계관/인생관의 오류

인간은 오류의 동물이다

 

인간을 사회적 동물이라고 한다. 이 말은 인간이 인간과 서로 관계를 맺으며 살 수밖에 없는 동물이라는 얘기다. ‘사회관계라는 개념은 정치나 경제, 문화 등 강조점을 달리하여 여러 차원에서 해석할 수 있지만 나는 인간 존재 자체의 특성에 초점을 맞추고 싶고, 그 중에서 인간의 오류 가능성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인간 사회를 제대로 이해하고 원만한 삶을 추구하고자 한다면 인간 존재의 오류 가능성에 대한 이해도 중요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인간 간의 관계나 상호작용은 다양한 범위에서 이루어진다. 좁게는 자기 자아와의 관계나 가족, 친구, 연인과의 관계에서 넓게는 국가 내의 시민들과의 관계와 세계적 차원의 세계 시민들과의 관계 등 그 범위를 달리하여 이루어진다. 그리고 비공식성과 공식성의 차원에서 보면 가족이나 친구 등 친밀함을 특성으로 하는 비공식적 관계나 직장에서 업무적 차원으로 맺는 공식적 관계로 분류할 수도 있다.

 

인간이 존재하는 한 관계를 벗어날 수 없는데 문제는 관계가 항상 원만하거나 조화로울 수는 없다는 것이다. 약속을 어기거나 상대방에게 실망과 불신을 안기는 것에서부터 절도나 폭행 심지어 (강간)살인과 같은 극단적인 범죄 행위까지 인간관계에서 이루어지는 다양한 행위들은 언제나 바람직한 방향으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런 인간 행태들은 단순히 그런 행동을 일삼은 개인의 인격적 자질에만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 것이고 사회구조적 차원의 문제가 훨씬 더 큰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살인과 같은 흉악 범죄가 발생하면 우리는 언론을 중심으로 그 원인을 살인 피의자의 개인적 결함에서 찾으려는 경향이 강하다. 예를 들어 피의자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거나 천성이 악한 인간이라는 식으로 문제의 초점을 당사자 개인에게 맞춘다. 그러나 재소자들의 가정환경이나 경제적 수준이 대개 공통적으로 열악했거나, 여성의 권리가 제대로 뒷받침되지 않거나 성범죄에 대해 관대한 사회구조적 환경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 경제적 분배가 평등한 나라나 여성 인권이 잘 보장되는 사회에서 범죄율이 낮은 것은 사회구조적 환경이 인간 행동에 얼마나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지 보여준다.

 

그런데 나는 인간이 상호 관계에서 범하는 어리석은 행동 모든 것이 개인적 차원이든 사회구조적 차원이든 인간 존재 자체의 근원적 결함에서 나온다고 본다. 이건 무슨 종교적이거나 신학적 해석 같기도 하지만 말 그대로 인간 자체가 신과 같은 완벽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이라고 본다.

 

사실 범죄와 같은 심각한 일탈 행위조차도 범죄 욕구 자체는 학력이 낮거나 육체 노동으로 먹고 사는 사람 등 특정 부류의 사람들에게만 한정된 것은 아니고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런 유혹을 느낄 수밖에 없는 난처한 상황에 처하면 다들 품게 마련이다. 그걸 마음에 품는 것과 행동으로 옮기는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존재하지만 적어도 범죄 욕구는 인간이 동물과 마찬가지로 본능과 욕구를 갖고 있는 존재라 특정 부류의 사람들에게만 한정된 것은 아니고 누구라도 품을 수 있는 보편적인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범죄까지는 아니더라도 자신의 우월적 권력 지위에서 상대방을 업신여기거나 자신의 이익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취급하거나, 가족 관계에서조차도 상대를 말로는 대단히 걱정하지만 실제로는 진정성이 거의 없거나, 상대방은 호의를 베풀고 협력적 행위를 보이는데 자신은 그에 상응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상대방으로부터 이익만 얻고 모른 체 하거나, 열심히 노력하여 자기보다 더 나은 성과를 얻거나 자기보다 능력이 뛰어난 사람에 대해 이유 없는 질시를 보내거나, 습관적으로 약속을 어겨 상대방에게 무성의하고 신뢰를 깨뜨리는 등 우리는 상대방의 존재와 관계를 거의 의식하지 않는 결함 있는 행위들을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보게 된다.




 

이런 행위들이 의도하지 않거나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나온 행위라면 모르겠으나 의도적이거나 무성의함으로 나오는 행위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살인 같은 인간 사회 자체를 부정하는 패륜적 행위조차도 부당한 국가 권력이 일삼는 의도가 개입된대량 학살 같은 경우는 달리 보고자 하지만, 개인이 저지른 경우는 그 개인에 대한 적개심이나 증오의 관점에서만 해석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본다. 목숨을 앗는 행위는 인간 사회에서 가장 금기시하는 범죄 행위이기에 살인 피해자의 원혼과 가족 등 관계자의 억울함에 대한 죗값과 책임은 응당 물어야 하지만 인간 존재의 오류 가능성측면에서 보면 그 행위자에 대한 제거로서의(사형) 처단만이 과연 해법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는다. (왜 국가 권력 집단이 저지른 살인은 부당하고 개인이 저지른 살인은 용서의 여지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살인 행위의 원인과 사회적 영향력 측면에서 차이가 크다는 이유를 들 수 있겠는데, 연쇄 살인 같이 피해자가 많은 경우에도 역시 살인 원인이 사회적으로 미치는 영향에서 권력형 살인과는 차원을 달리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물론 피해의 수준과 무관하게 원인에만 초점을 맞출 수 있는지 나 스스로도 의문이 있지만 사형제에 대한 찬반 여부는 이 글의 핵심 주제가 아니기에 이 정도로 하겠다.) 살인과 같은 극단적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가족이나 친구, 연인 관계에서부터 직장에서의 동료 관계까지 일상에서 부딪히는 여러 가지 결함 있는 행위들은 인간 존재의 오류 가능성측면에서 보면 이해할 수 있는 여지가 많다


문제는 그걸 왜 어느 한쪽에서만 이해해 줘야 하느냐는 것이다. 대개 그런 경우 이해해 주는 사람만 이해해 줘야 하는 경우가 적지 않고, 또 오류 행위자는 그런 행위를 반복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리고 인간이 오류를 범하는 동물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고, 상대방이 자기 과오에 대해 성찰할 수 있고 교정 가능성이 있는지에 대한 고려도 없이 매번 상대의 오류를 이해해 준다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나 같은 경우는 보편적 상식선보다 조금 더 높은 이해의 기준을 가지려고 한다. 그 이상은 어쩌면 나 같은 보통 사람에게는 무리가 있고 바다 같은 넓은 아량을 갖춘 종교 지도자들에게나 해당되는 부분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다. 그러나 인간 존재의 오류 가능성이란 인간 속성에 대한 이해는 상호 관계에 있어 완충지대를 만들어 주어 오해나 불신을 줄일 수 있고, 관계가 쉽게 위기와 대립으로 치닫는 것을 막을 수 있으며, 자신을 둘러 싼 사적 관계뿐만 아니라 사회문제에까지도 우리가 인간 존재와 사회를 어떻게 바라 봐야 하는지 의미 있는 시각을 제공해 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결론적으로 인간 존재 자체가 그런 걸 어쩌겠나. 나 같은 속 좁은 사람은 실제 현실에서는 상대방의 반복적 오류 행위에 대해 쉽게 참지 못하거나 외면하는 것이 사실인데, 일단은 자기 자신만이라도 상대방에게 바르게 행동하자는 주의를 갖고 있다. 인간은 오류의 동물이니...



그림 출처(둘 다 동일)

http://www.neolook.com/archives/20060620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