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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관/보수주의

일상 속 보수주의자들의 세계관 분석



진보주의나 보수주의 자체를 나쁘게 볼 필요는 없다. 어느 세계관이든 일장일단이 있게 마련이다. 이데올로기나 세계관이 문제가 되는 것은 사람들이 그릇된 가치기준이나 근거, 편견이나 선입견, 무지에 의해 세계를 바라보려하기 때문이다. 내가 볼 때 진보주의자도 예외일 수 없지만 보수주의가 보다 일반화된 한국 사회에서 이런 모습은 보수주의자들에게서 더 흔하게 나타나지 않나 싶다.

 

일반적으로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사람들은 보수화하기 마련이다. 자신의 경제적 부를 이룰 수 있었던 기존 체제를 옹호하고 그 부를 계속 유지하거나 자식들에게 대물림하기 위해 자신에게 유리했던 기존 질서를 옹호하는 것은 당연하게 여겨진다. 그 부가 정당하지 못한 방식으로 형성됐다면 더욱 그렇다.

 

우리가 일상에서 접하는 부유층이란, 사실 직접 대면하기보다 풍문으로 접하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지역 유지라고 하는 사람들은 말 할 것도 없고 좀 산다는 사람들조차 눈에 쉽게 띠지 않을 만큼 소수이거나,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못한 다수의 서민들과 어울릴 일이 없기 때문이다. 중간층 이하의 서민들에게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사람들로 더 쉽게 인식되는 계층은 아마 지방의 경우 10여년 이상의 경력과 급여 수준으로 아파트나 자가용 한 두 대 정도 유지할 수 있는 맞벌이 공무원 정도 아닐까 싶다.

 

이 정도 경제 수준을 누릴 수 있는 사람들을 보수층의 최소 기준으로 본다면, 우리 사회의 경제력으로 볼 때 보수층의 기반이 결코 얇다고만 보기는 어렵다. 이들은 자기 사회의 경제 체제를 적극적으로 옹호할 만큼 부유한 사람들은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최소한의 안정적인 삶은 보장 받을 수 있는 층으로서 보수적이거나 체제 친화적일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개인의 이념적 가치관을 경제적 수준으로만 판단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경제적으로 빈곤층에 속하는 사람들 역시 보수층이 다수이기 때문이다. 하위 층이 보수적인 이유를 따져 본다면, 그들의 정치의식이나 가치관을 왜곡시키는 보수 정권과 언론의 이데올로기 공세, 남북 분단 현실에서 북한의 위협 요소, 오랜 독재 정권과 유교 문화의 잔재로 인한 가족, 종교, 군대, 학교, 직장, 지역 등 한국 사람들이 살면서 속할 수밖에 없는 거의 모든 조직과 집단에서 오랫동안 뿌리박힌 권위주의의 영향 때문일 것이다.

 

일상 속 보수주의자들의 사고 틀을 분석할 때, 그들이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가장 기본적인 규범은 경쟁이다. 그들은 부유한 대기업 경영인이나 유명 고소득층의 부의 결과는 개인의 노력으로 인한 당연한 결과이고, 빈곤층의 가난 역시 개인의 노력 부족으로 인한 정당한 결과로 여긴다. 시장경제에서의 경쟁의 결과를 개인의 노력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으로 보고, 분배의 결과가 불공정 규칙과 계약 관계에서의 권력 불평등과 같은 사회 구조적 요인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다는 사회적차원에 대해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면이 강하다. 따라서 그들에게 시장 경쟁은 물론 모든 경쟁은 모두 공정하거나 아니면 어쩔 수 없이 인정해야 하는 제도로 여겨진다.

 

경쟁과 개인 노력에 대한 강조는 한국 사회에서 사회적 지위를 결정하는 공식화된 경쟁 제도인 대학입시에 대한 관심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사교육과 학벌사회가 온존하는 원인은 법과 제도적 차원에서 볼 수 있는 측면이 있지만, 기본적으로 한국 사회 다수의 구성원들이 내면적으로 승인하기 때문이다. 보수주의자들은 이러한 관점에 동의하거나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들이 경쟁의 결과에서 승자의 위치에 있으면 경쟁 제도에 대한 옹호는 더욱 강고해지고, 설사 패자의 위치에 있더라도 경쟁이 낳는 폐해에 큰 문제의식을 갖지 못하고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따라서 입시 경쟁 위주의 한국 교육 체제에 대해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의 관점을 비현실적인 것으로 보아 적대시하거나 어쩔 수 없다며 냉소한다.

 

보수주의자들의 경쟁 질서에 대한 옹호와 인정은 대학입시 뿐만 아니라 취업경쟁 등 모든 경쟁에 대한 승인으로 이어지는데, 사실 보수주의자들은 인생 자체를 경쟁으로 보고 극단적인 경우에는 인간 삶을 경쟁의 결과를 놓고 벌이는 적자생존이나 양육강식의 세계로 보는 측면이 있다. 따라서 문제는 다양한 자원 배분 방식 중에 유독 경쟁이라는 방식, 그것도 성과가 소수 승자에게 거의 모두 돌아가는 승자독식 방식인 몰빵’, 또는 ‘all or nothing’ 방식으로 구조화된 사회적 자원 배분 방식이 문제가 아니라 이 경쟁에서 진 사람의 노력 부족이 문제라는 것이다. 보수주의자들이 경쟁에서 패배한 빈곤층이나 사회적 약자에 대한 복지 지출에 반대하는 이유일 것이다.

 

경쟁의 결과는 결국 힘의 우열에 의해 결정된다는 점에서 그 힘이 신체적 물리력이나 외모, 학력이나 학벌 또는 금력이나 권력이든 결국 우월한 자들에 의해 형성된 질서를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계급이나 위계로 형성된 기존 질서를 옹호하거나 별다른 문제의식 없이 받아들이며 거기에 순응한다. 따라서 일상 속에서 기본적으로 물리력의 우위에 있고 사회적 영향력을 거의 독점하고 있는 남성중심의 사회 질서를 옹호하고 힘의 숭배에 기초한 군사주의 문화에 우호적이다. 또 직장이나 사회에서 상관이나 연장자에게 복종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며 권위주의 정권에 대해서도 옹호적인 태도를 보인다.

 

힘을 숭배하는 경쟁적 세계관과 관련하여 이들이 갖는 또 하나의 관점은 혈통과 유전에 대한 경외감이다. 전근대 사회는 기본이었고 개방화된 현대사회라고 해도 지식이나 신체적 능력 등 인간이 갖는 우월한 능력이 유전적으로 이어지는 부분이 있을 테고, 과거의 신분 능력을 대체하는 소수 명문 학벌이나 경제적 부를 소유한 일부 사람들이 자기들만의 끼리끼리관계를 형성하여 현대판 귀족 사회를 형성하고 있는 것은 엄연한 사실인데, 문제는 대개의 보수주의자들은 이런 유전혈통’ ‘명문에 대한 경외감은 물론 이런 소수 세력에 의해 유지되는 사회 질서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특권화된 세력을 아무렇지 않게 인정한다는 점이다. 특권 세력이 지배하는 사회를 당연하다고 보고 인간의 존재 가치가 혈통이나 유전 등으로 운명 지어졌다는 관점은 그들이 경제적으로 하위층 등 사회적 약자일 경우 노예근성을 내면화 시킬 가능성이 있다. 현대 사회에서 노동 능력의 차이로 인해 소득에서 차이가 날 수는 있어도 투표권에 차이가 나는 것이 인정되지 않듯이, 인간 존재 자체에 대한 차별이 과연 가능할까? 문제는 이렇게 우월한 혈통이나 유전을 지닌 사람들을 특권화하는 내용들이 문학 작품 등에서 자주 나타났고 근래에는 오히려 영상매체의 발달로 일상적인 드라마 등에서 더 큰 영향력을 미치는데 이런 관점이 일상에서 사람들의 정치 의식을 보수화하는데 영향을 미치지 않나 싶다. 예술작품에서 주인공이 남 다른 가치를 지닌 특별한 존재여야 흥미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문제는 그런 사람들이 따로 정해져 있다는 식의 혈통이나 유전, 명문에 대한 동경은, 기회가 확장되고 능력 우위의 시대인 현대의 개방 사회에서 여전히 소수 세력들의 특권만 정당화시킨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결론적으로 일상 속 보수주의자들은 전근대 신분사회와 달리 권리의 주체가 개개의 평등한 시민들로 구성된 현대사회에 살고 있다 해도 인간 사회가 계급이나 계층, 위계로 형성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심지어 혈통이나 유전, 명문의 존재를 동경하면서 인간 존재가 평등하다는 전제 자체를 동의하지 않는다.

 

경쟁적인 질서로서 하나의 사회 체제가 안정적으로 작동하는 것에 대한 기대는 단일한 정체성으로 유지되는 획일화된 사회를 지향하게 되고, 따라서 국가주의나 집단주의에 우호적이며 기존 가치와 차이를 보이는 다양한 관점에 대해 그것을 기존 질서나 가치에 대한 도전으로 여겨 배타적인 태도를 보이게 된다. 보수주의자들이 성소수자나 군복무 대체를 주장하는 사람들, 또는 특정 지역 사람들이나 이주노동자들에게 적대적이거나 냉소적인 태도를 보이는 이유일 것이다.

 

일상에서 접하는 보수주의자들은 사회적 쟁점에 대해 거의 관심이 없다. 그들은 드라마나 오락 프로그램, 야구나 축구 같은 대중문화나 스포츠, 또는 직접적으로 자기 주변에서 일어나는 연애담이나 취미, 가족 관계나 인간 관계 등 민간이나 세속적 신변잡기로 그들의 일상적 관심 영역(이야기나 담론 내용)의 대부분을 구성한다. 설사 사회적 쟁점에 관심이 있더라도 자신의 정치 의식 형성에 거의 절대적인 영향력을 미치는 주류 보수 언론의 보도 내용이나 태도를 거의 의심 하지 않고 진리인 양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인다. 관점을 달리 하는 다양한 언론의 논점을 비교 분석하는 것은 물론 책이나 잡지 등 다양한 관점을 접할 수 있는 매체에 접근할 시간적 여유에 한계가 있고 독서량도 풍부하지 않는 등 문화적 풍토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사고나 관점이 정보 제공 매체의 그것과 거의 동일시될 수밖에 없다. 일상 속에서 다수 대중의 가치관이 보수 매체의 보수주의와 동일시 되는 이유일 것이다.

 

또 사회문제를 바라보는 관점은 자신이나 가족의 이해관계 틀 이상을 벗어나지 못한다. 사회 문제로 인한 이익과 손실의 범위가 자신이나 가족의 손익 관점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사회 문제를 바라보는 기준은 이기주의 또는 가족이기주의가 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들 중 일부에게는 친일파나 독재정권 부역자들은 사실 그렇게 문제 있는 사람들이 아니거나 당시의 상황논리에 의해 정당화 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이런 관점의 연장에서 그들은 권력자들 중심으로 발생하는 사회적 부패나 부조리에 대해 비판하는 사람들을 냉소하고 부정과 불의를 합리화하는 입장에 동조한다. 정의의 원칙이 사회 문제를 바라보는 기준이 아니라 자기 이익이 기준이 되다 보니 세상이 원래 그렇다는 자기합리화의 관점이 이들에게서 어렵지 않게 확인된다.

 

결론적으로 이들의 보수주의를 학문적이거나 체계화된 보수주의가 아니라 일상의 대중 속에서 민간적으로 접할 수 있는 보수주의로 볼 때, 사회 문제에 대한 시각이 자신과 가족의 테두리에 머물러 있고 민주주의나 인권, 정치 개혁, 공공성과 복지, 시민성 등 공적인 영역까지 확대되는 경우는 거의 접하기가 힘들다. 어쩌면 자신이나 가족과 같은 사적 범위를 벗어나 사회적으로 보다 확장된 영역인 공적 가치와 공공성 담론은 명문 대학 나온 배운 놈들에게나 맞는 얘기고 자기 밥그릇 하나 건사하기 힘든 현실에서 세상 물정 어두운 이상적인 사람들의 얘기에 불과하다. 그나마 이들이 공적 영역을 논할 때 한마디씩 던지는 견해는 대개 ‘9시 뉴스나 보수 신문 등 주류 보수 언론의 논점을 반복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들에게 공동체 문제에 관심을 갖는 공화주의적 덕성을 갖춘 시민성의 가치를 확인하기가 어려운 부분일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일상 속 보수주의자들 중에는 북한의 위협에 대해서는 그것이 꼭 자신이나 가족의 이익과 동일시된다고 여겨서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가족을 넘어 국가공동체로서의 공동의 이익이라는 것이 있다고 여기고, 자신들의 관점과 반대에 서 있는 진보적 가치를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이들로부터 우리 사회의 안정을 위해 지켜야 할 어떤 공동의 가치가 있다고 여기는 사람도 많다. 따라서 이들은 선거 시기에는 자신들이 지지하는 보수 세력에게 적극적인 지지를 표한다는 점에서 이 국가 체제를 공동의 이익과 가치를 공유하는 하나의 공동체개념으로 이해한다. 이들이 사회와 유리된 채 사회 현상에 무관심하거나 사회 현상을 자기나 자기 가족의 이익의 관점에서만 바라보지 않는다는 증거일 것이다.

 

끝으로 보수주의자들은 북한을 적대시하고 미국을 지지한다는 점도 지적해야겠다. 북한을 적대시하는 이유는 한국 전쟁이나 북한의 도발 행위 등 역사적 사실이 있고, 또 북한 체제의 실패가 보여주는 현재의 후진적 상황이 근거가 될 것이며, 과거 세대에게는 오랫동안 내면화된 반공 교육의 결과 등도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미국을 지지하는 이유는 미국의 한국 전쟁에 대한 군사 개입과 분단 이후 군사적 지원에 의한 현 사회 체제의 유지, 세계 일류 선진국으로서의 미국의 위상에 대한 동경이 그들이 미국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는 이유일 것이다. 근데 이런 관점이 문제가 되는 부분은 평화통일이 민족적 당위라는 점, 남북 갈등 비용의 극대화 등 남북 관계를 사고하는 데 있어 합리적 관점이 부족하고, 미국에 대해서는 상식적으로 미국의 외교 및 군사 행위가 동북아와 한반도에서 자국 이익의 극대화라는 점에서 비판적으로 이해하는 능력이 부족하고 단순히 우방이나 혈맹 등 관념적이고 유치한 이해 수준을 갖고 있어 극단적인 사대주의까지 확인된다는 점이다.

 

정리를 하면 보수주의자들은 한국 사회에서의 생존 방식을 경쟁적 관계로 이해하고 승자독식 체제에 대해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며, 사회가 계급과 위계로 형성되어 인간은 평등하지 않다는 전제를 갖고 있다. 따라서 우월한 힘과 권력을 소유한 소수 세력들에 의해 유지되는 사회 체제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힘과 권력, 유전과 혈통, 명문 등을 동경하는 측면이 있다. 또 단일하고 획일적인 가치를 지향하면서 국가주의나 집단주의에 친화적이며 국가나 집단의 이익이 언제나 개인의 이익보다 앞선다고 생각하면서 사회가 여러 세력들로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다는 생각에 동의하지 않고 그들의 다양한 가치에 배타적이고 그들의 주장을 기존 질서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이는 측면이 강하다. 다른 한편으로 기본적으로 사회 문제에 무관심한 사람들이 많고 관심이 있더라도 자기 이익이나 가족 이익의 관점에 머물러 있어 그들에게서 자기 이익을 넘어 공동체의 문제를 함께 고민할 수 있는 공화주의적 덕성인 시민성을 확인하기가 어렵다.

 

 

학문적으로 체계화되고 정립된 보수주의는 도덕적으로만 규정하는 데에 무리가 있다. 나름 논리적 틀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진보적 관점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정치적 관점으로 인정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보수주의와 연결이 되긴 하지만 일상적 보수주의자들에게서 나타나는 보수주의는 논리적이거나 도덕적으로 모순점이 적지 않기에 도덕적으로 규정할 부분이 있지만 이글에서는 되도록 그들의 관점을 확인하고 분석하려고 했다.

 

보수주의가 역사적이고 사회적으로 인정된 전통을 존중하고 현실적이며 신중하다는 점에서 충분히 인정할 가치가 있고 이런 부분은 일상적 보수주의자들의 관점에서도 확인되기에 역시 인정할 부분은 있지만, 소수 세력들이 부당한 이익을 독점하는 낡은 체제나 기득권 질서를 전통으로 착각하는 부분 등은 극복해야 할 것이다. 진보주의자들이 한국 사회에서 보다 책임 있고 능력 있는 세력이 되고자 한다면 비현실적인 이상만 쫓을 것이 아니라 보수주의자들의 관점에서 타당한 부분은 받아들이되, 진보주의를 보다 다듬고 균형 잡힌 안정된 논리 틀로 갖춰 보수주의의 한계를 더 분명하게 증명해야 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일상적 보수주의자들이 자신의 이익과 결코 일치하지 않는 보수주의의 관점을 자각하여 기존의 세계관을 교정 할 수 있도록 하고 진보가 내세우는 가치에 동의하게 함으로써 일상적 진보주의자들이 더 많이 나올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